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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예술공연단, 소록도병원 원생과 함께하는 행복나눔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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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2회 작성일 23-12-2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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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전국교수회
후원 : (사)한국시민기자협회, (사)1004클럽나눔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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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1일,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예술공연단(단장 김민성)은 소록도병원 원생과 함께하는 행복나눔음악회를 주관하여 소록도에 다녀왔다. 민성아 가수를 단장으로 가수 김영애, 혜민, 김경아와 한춤 오수연, 박주언 단원과 각설이 임선희로 구성된 예술공연단과 특별초청 명창 권하경은 구수한 입담과 넘치는 해학, 그리고 감동적인 공연으로 소록도병원 복합체육관에 모인 원생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선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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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의 두 어머니라 불리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다룬 다큐방송을 시청하게 된 (사)한국시민기자협회 고성중 사무총장의 제안으로 김양록 이사장과 (사)1004클럽나눔공동체 양승수 총재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번 봉사활동은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전국교수회 소속 교수들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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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존칭생략) : 김양록 고성중 양승수 정연수 최유경 김연이 김대중 구미례 이재경 이병우 양홍숙 권경희 유정봉 배영후 이양영 김영수 고옥님 전태석 송태주 유정봉 이상옥 그리고 김회수 이경우.

한국시민기자협회 김양록 이사장과 고성중 사무총장은 "앞으로도 봉사와 배려 나눔의 행사를 통해 선한 시민의식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자고 따뜻한 인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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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수 교수는 "소록도가 처음이었는데 소록도의 역사를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의 한 맺힌 사연들을 듣게 되었다"며 "되풀이 되어선 안되는 아픈 역사였고,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역사임을 알았다"고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소록도에서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전라남도 고흥의 푸른 황토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다 건너 작은 섬 국내 유일의 한센병 전문병원이 있는 소록도가 있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정든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소록도에 와야만 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소록도의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해 한센병 전문병원인 자혜의원을 설립한다. 하지만 치료는 구실일 뿐 사실상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이주와 격리 조치였다.

1933년 소록도로 부임해온 스오 원장은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바꾸고 3,000 여명의 한센인들을 수용하겠다 호언장담한다. 이 환자들을 수용할 건물을 짓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가 펼쳐지는데 동원된 인부들은 다름 아닌 소록도의 한센인들이었다. 소록도 곳곳에서 펼쳐진 건물 신축공사와 도로 확장공사 골지 운반 등의 한센인들이 동원됐고 아픈 환자들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부족한 병원 재정을 충당한다는 명목 하에 원생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여 손발이 불편한 한센인들에게 연간 30만 장에 달하는 가마니를 짜게 하고 거대한 벽돌 공장을 세워 벽돌을 굽게 했으며 중노동에 시달리다 못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소록도를 탈출하기에 이른다. 중노동에 시달리던 한센인들은 시름시름 앓아갔고 치료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아픈 환자를 돕던 젊은 청년은 일터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사토 수간호장에게 갖은 폭행을 당하고 결국 감금실에 갇히고, 단종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계속되는 핍박 속에 1939년 12월 스오 원장은 소록도에 공원을 조성하겠다 발표하고 아시아 각지에서 조달된 수백 그루의 나무가 소록도로 공수되고 환자들은 맨손으로 나무와 돌들을 옮겨 지금의 중앙공원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소나무와 향나무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지금의 중앙공원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눈물의 공원이며, 공원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바위는 한센인들에게 유독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원을 장식할 거대한 바위는 수십 명의 장정이 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바위를 옮길 때면 사토 수간호장은 바위 위에 올라 사람들을 호령했고, 바위를 옮기다가 사고가 나기 일쑤였고 게으름을 부리면 바로 채찍이 날아왔다. 옮겨도 죽고 옮기지 않아도 죽는다 해서 한센인들은 이 바위를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불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남북 분단과 6·25동란을 거치며 역사적 격변기를 지나왔지만 소록도의 가슴 아픈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센인들과 일반인은 철저히 분리 수용됐고 한센인 부모들은 아이가 있어도 제 손으로 키울 수 없었다. 보육시설을 만들어 아이를 따로 키우고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면회날이 되면 자식을 눈앞에 두고도 안아보지 못하는 부모들의 탄식이 소나무 숲에 가득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탄식의 장소 ‘수탄장’이라 불렀다.

1962년 정부는 소록도의 한센인들에게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해 뚝을 쌓아 새로운 간척지를 만들면 그 땅을 무상으로 분양하겠다는 새로운 희망을 약속한다. 소록도가 아닌 섬 바깥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센인들은 팔을 걷어붙였다. 피땀 흘려 간척한 땅은 1,500세대가 2,500여 톤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땅이었다. 그러나 사업권이 이전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1,000ha에 달하는 비옥한 간척지는 결국 1988년 한센인들이 아닌 지역 주민들에게 분양되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서당과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했다.

소록도 100년 한센병은 알약 하나로 완치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전염의 위험은 사라졌지만  나병 또는 문둥병으로 멸시와 차별의 100년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한센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다.

[ 한국저널리스트대학교육원 치유음식학 시민교수 이경우 씀 ]